“저렇게 급하실까 …”라며 약간의 미소를 담아 말 할 수 있을 때까지 …

그런 단어는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런 단어에 의해서 수식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단어와 그 비슷한 개념과 용례와 뜻으로 쓰이는 단어들을 몰아 놓아 본다면, 이것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금세 한숨을 쉬겠지..

그리고 드라마 “참 좋은 시절”의 김지호의 배역은 이런 글이라도 써놔야 겠다는 가짐을 시키고야 말았다.
김지호는 약간은 특이한 자폐를 가지고 있는 강동욱이라는 한 사람으로 이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다.

우선, 이번 글의 내용은 쓰는 입장에서도 매우 마음에 안든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써야할지를 모르겠다. 이 글에서 나올 몇몇, 일련의 단어들은 상당히, 혹은 매우 불쾌한 단어와 표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개념과, 캐캐묵은 습관, 그 표현들이 내 안에서 그렇게 쉽사리 사라져 버리거나 할 것 같지도 않으니 더더욱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집 앞이었다. 사거리 횡단 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그러던중 누군가 내 뒤에서내 어깨를 툭! 하고 강하게 치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역시나 이런 경험이 평소에 많았다 한들, 툭한 그 순간 그 찰나 만큼은, 그 타인은 나를, 잠시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고,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뭐,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마, 저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무조건 반사적으로 “저렇게 급하실까 …”라며 약간의 미소를 지으려는 준비 혹은 시뮬레이션을 내 머릿속에서 하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이런 일을 경험한 후 대부분의 경우에는 “저렇게 급하실까 …” 라는 어쩌면 그나마 괜찮을 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쳤을 태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나는 이내 나올, 이야기들을 낸뒤에 곧,  거지같은 결론을 내버린 나에게 약간의 혐오와 동반된 짜증이 나버렸다.

내 어깨를 툭하고 치고, 밀치고 지나간 분은 어떤 남성 분이었던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는 이분을 강동욱이라는 등장인물로 부르려고 한다.

나는 내 앞, 횡단보도의 가장 앞에서계신 강동욱이라는 분을 보는 찰나를 시작으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줄을 1분정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들어가버렸다.

시작>
– “그럴만 하네, 나름 이유가 있네”라며 평소와 같이 이유를 찾아 버린다.
– “설마 저분을 누군가 불쾌하게 바라보지는 않겠지?” 라며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목격해 봤자 아무말 할 무엇도 없는 주제에.)
– 그리고 맨 앞에 서있는 강동욱 씨를 보면서,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곳과 가장 가까운, 물론 안전하지만 그 차가운 자동차들과 가장 가까이에 계신 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리고는 주마등이 스쳐갔다. 이전에 미디어로 접했고, 내 눈으로 접했던 일련의 그림이 떠올랐고 항상 가장 차가운, 쇳덩이로된 차들과, 가장 따스하지 않을 이질적인 저런 차들과 가까이에 있던 여러 강동욱씨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느꼈다. 그리고는 다시 이유를 찾았다.

  • “아, 저런 곳에 계신게 더 안전하신 건가? 설마, 왜?”
  • “누군가 저분들에게 앞으로 가는 것이 안전한 거라고 말씀 하신 건가? 아니면 저런 곳에 서있는게 차라리 더 괜찮은 것이라고 알려 드린 것이었을까?”

사실 위의 두줄의 논리적인 이유따위는 없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다만, “강동욱 씨”라는 조건이 끼어들었을 뿐이다. 아니, 그렇다 “강동욱”이라는 분이 아니라, “강동욱 씨”라고 말하는 과정에서 펼쳐진 일련의 학습된 관념들이 그 조건을 형성했고 이내 나는.
‘그래, 그렇게 하셨던게 더 괜찮았을 수도 있겠다.’라는 몰상식한 ‘이유’를 찾아 버린다.

강동욱이라는 바보라는 이런 몰상식한 조건과 이유는 다시 몰상식한 이유를 찾아 내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못되먹은 결론을 찾아 버린 것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에게도 “바보”라는 수식어를 쓸 수는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발랑까진 초등학생도 함부로 “바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한다. 담아도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발랑까진 마음대기도 그렇게 무거워지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강동욱 씨” 말고 다른 친구들에게는 그런 단어를 자주 쓴다. 친구들 뿐이랴 가족들 뿐이다. 그것은 내 친구가, 내가족이 이른바 “장애인”으로 구분되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어 가능해진다. 그렇다. 도리어 마음에 많은 상처를 남기지 않는 농담으로써 사용이 가능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내 친구가 내 가족이, 강동욱 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강동욱 씨를 애둘러 이렇게 말한다. “장애우” 혹은 “장애인” 혹은 애둘러 “아픈사람, 불편한 사람”, 한때 나라에서 사회에서, 부정적 시각에 대한 순화를 강조 하면서 나온 “장애우”라는 용어 이건 본래 지칭했었던 “장애인” 이건 간에, 세월이 흘러 우리의 의식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자부할 수 있건 없건 간에, 내가-우리가, 강동욱 씨를 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장애”라는 수식어다.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뒤따라 오건, “사람”이 뒤따라 오건, 우리내가 주목하는 것은 “장애”라는 티끌만큼도 소중하지 않은 수식어구다. 그리고 이것에 주목하면서 도리어, 뒤따라오는 “친구”와 “사람”을 티끌만큼도 소중하지 않은 수식어구 보다 못한 삼류의 껍데기만 남아있는 팔랑대는 쪼가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 같은 생각이 스친것은 분명 몇일전 신호등에서, 그 신호를 기다리면서 였다. 덕분에 신호를 받고, 길을 따라서 은행가는 길이 불쾌했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졌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강동욱은 제 앞에 자신을 드러내여 다시 나를 보여주신다. 친히 내가 나를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누군가 나를 불쾌하고 아프게 했으니 왜 누가 그랬는지를 알아야겠다.
누군가를 보고 저사람은 왜 이렇게 했을까를 알아야겠다.
누군가를 보는 다른 누군가들이 있을지 없을지 노심초사 할 것이지만, 역시나 알아야겠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알아야겠다. 알고 싶다.
…(이후 생략) 알아야겠다. 알고싶다.
… (이후생략) 알아야겠다. ….. . . . .

이런 나다. 마치 “알아야겠다. 알고싶다”를 주구장창 왜치고 다니는 이상한 것 같다. 진짜 아프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나쁜 것 같다.
“가장 따스하지 않을 이질적인 저런 차들” 이라고? 그러는, 이러는 나란 놈은 얼마나 따스하지 않을 생각을 줍지도 않고 내 던지고 있었던 것이었나.

얼마나 따스하지 않을 그런 것을 줍지도 않고, 품어 보지도 않고, 내던지고 있었는가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적어도 거기있던 바깥의 자동차 보다는 더 따듯하거나, 그들이 바퀴만큼은, 마치 바퀴정도는 되어, 따듯했으면 좋겠다.

일단 주워담자. 얼마나 따스하지 않은 그런 것들을 하나씩 주워담아 내가 안아 보자. 그리고 다시 던지게 될 때마다 다시 주워 담아, 그 담았던 모든 것들을 다시 보자.

그렇게 되면 다음과 비슷해지리라 소망해 본다.
“저렇게 급하실까 …”라며 약간의 미소를 지으려는 준비 혹은 시뮬레이션을 내 머릿속에서 하고 있었을 터였다.

다시 이와 같은 경우에 다시, 적어도 이럴 때만은 내 속에서 더이상 사람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나와 다른 점보다 나와 같은 점이, 나와 남이 아닌, 내안에 있는 나와, 내 밖에 있는 또 다른, 비슷한 너로써, 기껏해야 삐쭉나온 한 끝 차이의 너만이 당신만이 있기를 다짐한다.
“저렇게 급하실까 …”라며 약간의 미소를 담아 말 할 수 있을 때까지 …